충의공 정기룡 (1562 ~ 1622)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이 있었다.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해 왜군이 보는 앞에서 왜군의 배를 갈라 생간을 씹어먹으며 돌격, 7일 동안 25개의 왜군부대 총 9천명에 가까운 병사를 고작 700의 병사로 해치웠으며, 금산전투에서는 적에게 사로잡힌 상관을 구출하기 위해 혼자 적진을 휘저으며 구출해 내어 임진왜란의 조자룡이라고도 불림.
곤양의 수성장이 되어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움.
진주성으로 파견, 김시민에게 배속되어 진주대첩에도 크게 기여
왜적에게 왕자를 내준 반역자 김수량 등 16인을 효수.
고령에서 적 장수를 생포.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
등등등...
그의 전적은 60전 60전승 0패.
주요 전투
한성→거창(우지)→거창→김천→진주→상주(용화동)→상주(화령)→상주 목성→영천→문경(당교)→상주(대승산)→상주(북장사)→예천→고령(용담천)→성주→고령→합천→합천(초계)→의령→영동→보은→합천→함양(안음)→거창→경주→도산성→김천→거창→거창(가조)→함양(사근역)→합천(삼가)→거창→합천(초계)→합천(삼가)→무주→진주→사천→단성→창원→진해→고성→하동(곤양)→영산→합천→성주→합천(야로)→합천(삼가)→사천→성주→현풍→합천(초계)→고령→거창(지례)→진주→영성→하동(곤양)→사천→사천 왜성
하지만 당시 나이가 어리단(31세) 이유 하나만으로 공신에서 제외되었다가 150년이 지난 뒤에서야 겨우 충의공의 시호를 받음. 당시 입지가 굉장히 빈약한데다 전쟁이 터지자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 민심마저 잃은 선조는 민심이 쏠려있는 젋은 나이대의 전쟁영웅들을 '민병대를 조직했다' 라는 이유 등으로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해버리는 경우도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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